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管仲(ca. 720BC-645BC)과 윤리적 강단

곽신환, "정약용의 管仲觀" 동양철학 제19집 (2003)
김성준, "다산과 일본 고학파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의 管仲論", 동양한문학연구 제34집 (2012)

1. 관중과 桓公, 公子糾

2. 관중은 쪼잔해! 예법도 몰라!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관중은 쪼잔해." 누가 물었다, "관중이 검소했다는 뜻입니까?" 선생님이 말했다, "관씨는 집이 세채나 있었고 집마다 직원과 하인들이 따로 있었어. 그게 검소한건가?" "그렇다면 관중이 예법을 알았다는 뜻인지요?"라고 묻자, 선생님이 말했다. "제후국의 제후들이나 나무장식문을 두는데 관씨도 나무장식문을 가지고 있었고, 제후들이 서로 접대할 때 사용하는 음료 테이블을 관씨도 가지고 있었어. 관씨가 예법을 안다면 개나 소나 예법을 알게?"
子曰:「管仲之器小哉!」或曰:「管仲儉乎?」曰:「管氏有三歸,官事不攝,焉得儉?」「然則管仲知禮乎?」曰:「邦君樹塞門,管氏亦樹塞門;邦君為兩君之好,有反坫,管氏亦有反坫。管氏而知禮,孰不知禮?」 (八佾 3.22)

3. 하지만, 윤리적 강단은 달라.

누가 자산에 관해서 물어보자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좋은일 많이 한 사람이지." 자서에 대해서 묻자, 선생님이 말했다. "그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도 말어." 관중에 대해서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인물이지. 병읍(駢邑)을 백(伯)씨로부터 몰수했는데 삼백 가구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가난하게 살면서도 평생 원망하는 이가 없었지."
或問子產。子曰:「惠人也。」問子西。曰:「彼哉!彼哉!」問管仲。曰:「人也。奪伯氏駢邑三百,飯疏食,沒齒,無怨言。」 (憲問 14.9)

자로가 이렇게 말했다. "환공이 공자 규를 죽게 했을때 소홀은 죽음으로 저항했는데 관중은 죽지 않았어요. 윤리적 강단이 모자란것 아닌가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환공이 아홉 제후국을 규합하는 일을 전쟁 한번 안치르고 성사시킨 것은 관중의 능력이었어. 그 정도 윤리적 강단이 어디 있나. 그 정도 윤리적 강단이면 됀거지."
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子曰:「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 (憲問 14.16)

자공이 이렇게 말했다. "관중은 윤리적 강단이 없는 자 아녜요? 환공이 공자 규를 죽게했을 때 죽음으로 항거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공의 재상이 되었잖아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관중은 환공을 보좌하여 여러 제후국의 패권을 차지하고 천하를 바로잡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어. 관중이 없었어봐, 오랑캐들이 우리를 지금 지배하고 있을거야. 필부들처럼 소갈머리 없이 자결하고 그 시체가 시궁창에 딩굴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런걸 원하나?"
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子曰:「管仲相桓公,霸諸侯,一匡天下,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憲問 14.17)

‘仁’이란 무엇인가?

“仁”이라는 글자를 우리는 흔히 “어질 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질다”가 무슨 뜻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꾹 참고 너그럽게 관용의 미덕을 베푸는 것, 꼴보기 싫어도 온화하게 용서해주는 것, 자비롭고 따뜻하게 품어주는 것이 인(仁)이라고들 생각합니다. 영어권의 중국학 연구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benevolence, compassion 등으로 仁을 번역해오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仁과 人이 발음도 같고(ren), 상형 구조도 근접하며, 실제로도 고문헌에 자주 혼용되는 사례가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상대를 대하는, “온정이 넘치는” 태도가 仁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인간적”이라는 것이 뭔지 저는 도통 모르겠지만. 영어권 학자 중에도 이런 견해를 채용하여 humaneness 라고 仁을 번역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의 설명을 함 보죠.

까칠하고, 깐깐하고, 투박하고, 말 수도 별로 없는 것, 이게 오히려 仁에 가까워. 剛毅木訥,近仁 (논어, 13.27)

더러운 꼴을 보더라도 “좋은 낯으로, 부드럽고, 점잖게 말하는 것”? 그건 “교언영색”이고, 仁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멉니다(巧言令色,鮮矣仁)! 당대 사람들도 이점을 흔히 헷갈려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은 이 구절을 여러번 반복하여 강조합니다(논어, 1.3, 17.17). 공자도 이렇게 말합니다.

듣기 좋은 말이나 하고, 좋은 낯으로 대하고, 졸라 공손하게 행동하는 것을 쭈오치우밍은 쪽팔려 했어. 나도 그래. 원한을 감추고 친구처럼 좋게 대하는 짓을 쭈오치우밍은 부끄러워 했어. 나도 그래. 巧言、令色、足恭,左丘明恥之,丘亦恥之。匿怨而友其人,左丘明恥之,丘亦恥之 (논어 5.25)

불의를 보고도 “자신을 억누르고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어질다(仁)”고 하나요? 그건 비겁한 짓이고, 공범자가 저지르는 행동입니다. 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참지 않고” 맞서는 용기, 결기, 강단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仁”에 가깝습니다. 쫄아서 꼬리를 내리고 “꾹 참는” 것이 仁이 아닙니다. 쫄지 않는 용기, 피해를 보더라도 과감히 맞서 짱돌을 던지는 “깡아리”가 오히려 ‘仁’에 가깝습니다.

仁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 하지만, 용기가 있다고 해서 仁한 것은 아니지. 仁者,必有勇。勇者,不必有仁 (논어, 14.4)

仁은 한마디로 “윤리적 결기”, “쫄지 않는 강단”입니다. 물론 올바른 판단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겠지요. 사시미칼을 마구 휘둘러 대는 조폭도 쫄지 않기는 마찬가지니까요. “용기 있다고 해서 仁한 것은 아니다”라는 중요한 단서가 그래서 붙는 것입니다.

누구를 감싸주고 옹호하는 것, 이것도 윤리적 강단이 필요하고, 누구를 증오하고 공격하는 것도 윤리적 강단(깐깐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唯仁者, 能好人 能惡人 (논어, 4.3)

“仁”을 그저 너그러움, 자비, 관용, 인자함, 심지어는 온순함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논어 귀절의 많은 부분들이 그 의미가 심각하게 훼손되고 왜곡되어 왔습니다. 관중에 관한 다음 귀절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 귀절에 나오는 仁도 너그러움이나 인자함이 아니라, “윤리적 강단”, 이른바 “치열한 도덕성”의 문제를 다루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仁”이라는 단어는 “도덕성”이라고 표시하겠습니다(“어질다”라는 한심한 오역을 피하기만 하고, “仁하다”라고 그냥 둘 경우, 읽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인자함/너그러움/온순함이라고 백발백중 오해하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이란 무엇인가?

자공이 말하기를, “관중은 도덕성이 없는 자 아닌가요? 제 환공이 그의 형(糾)을 죽게했을 때, 관중은 자살하기는 커녕 환공 밑에서 벼슬을 했잖아요.” 子貢曰:「管仲非仁者與?桓公殺公子糾,不能死,又相之。」

규와 환공은 형제 간이었고, 관중은 원래 규(糾)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규와 환공이 제(齊)나라 제후 자리를 놓고 “형제의 난”을 벌일때, 규를 보좌하던 관중은 환공을 살해하려 시도했으나 실패하였고, 규는 이웃나라로 도망가고 그 동생 환공이 제나라 제후가 된 후, 이웃나라를 압박하여 규를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자신의 보스가 이렇게 살해되면 관중도 마땅히 자결하는 것이 당시의 “도덕성”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관중은 친구(포숙아)의 빽을 동원하여(이른바 “관포지교(管鮑之交)“) 오히려 환공의 재상으로 기용되는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자공(공자의 제자)은 바로 이점을 지적하며, 관중의 파렴치한 “배신”과 “줄타기”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도덕성 제로(0)”라는 것이죠. 참조.

공자의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관중은 환공을 보좌하여 여러 제후국의 패권을 차지하고 천하를 바로잡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그 혜택을 누리고 있어. 관중이 없었어봐, 오랑캐들이 우리를 지금 지배하고 있을거야. 필부들처럼 소갈머리 없이 자결하고 그 시체가 시궁창에 딩굴어도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그런걸 원하나? 「管仲相桓公,霸諸侯,一匡天下,民到于今受其賜。微管仲,吾其被髮左衽矣。豈若匹夫匹婦之為諒也,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논어, 14.17)

자로(공자의 제자)도 비슷한 질문을 했고, 공자의 대답은 더욱 분명합니다.

“환공이 규를 죽게했을 때, 소홀(召忽)은 자결했는데 관중은 자결을 안했어요. 도덕성이 없는 것 아녜요?” 子路曰:「桓公殺公子糾,召忽死之,管仲不死。」曰:「未仁乎?」

“환공이 아홉 제후국을 규합하는 일을 전쟁 한번 안치르고 성사시킨 것은 관중의 능력이었어. 그 정도 도덕성을 갖춘 사람이 어디 있나. 그 정도 도덕성을 갖춰봐.” 子曰:「桓公九合諸侯,不以兵車,管仲之力也。如其仁!如其仁!」 (논어, 14.16)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정당화 된다”거나, “부도덕해도 좋다, 부자되게만 해다오”라는 따위의 천박한 주장을 공자가 내세우는 것은 물론 아닙니다. 논어의 여러 다른 귀절들을 보면, “도덕성(仁)”은 공자가 설파하는 윤리 체계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것이지만, 결코 단순한 흑백 논리로 단정 짓거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내세울 수 있는 도그마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사안의 경중을 종합적으로 살피고, 상황과 처지를 두루 감안하는 균형 감각이 필요합니다. “도덕성”이 마치 무슨 “절대적 가치”인양, 하늘이 두쪽 나도 관철되어야 할 “하느님 말씀”인양, 앞뒤 물불 안가리고 시도때도 없이 들이미는 경박하고 교조적인 태도는 민폐를 끼칠 뿐입니다. 거기다가 만사를 “논리”로만 재단하려는 단순함까지 더해지고, 자신의 도덕적 우월감까지 부지불식 간에 스며들게 되면, 뭐 거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되는 것이지요.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용기는 있으되 가난함을 질색하면 반란으로 세상을 어지럽히지. 사람들의 윤리적 결함을 미워하는 것이 심해져도 세상을 어지럽히게 돼.   子曰:「好勇疾貧,亂也。人而不仁,疾之已甚,亂也。」 (泰伯, 8.10)

다음 귀절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공자님 말씀”입니다. ^^

기쁜 마음으로 도덕성을 실천하는 사람은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미워하지 않아. 그런 경우 못봤어. 도덕성을 흔쾌히 실천하는 사람은 그걸 그리 대단한 것으로 여기지 않지만,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미워하는 자는 그걸 도덕성이라고 여기지. 도덕성이 모자라는 자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을 높이려하지마. 我未見好仁者,惡不仁者。好仁者,無以尚之;惡不仁者,其為仁矣,不使不仁者加乎其身。(논어, 4.6)

지가 좋아서 도덕적인 삶을 사는 거라면(好仁者), 그게 뭐 대단할 거 있나요? 상받고 칭찬받으려고 그렇게 사는 분들에게는 그게 엄청 소중하고 존귀한 것이어야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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